침례교회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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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례교회의 시작

 

성경속의 교회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 성령강림과 제자들의 복음 전파로 시작된다. 예수님을 둘러싼 모든 사건은 복음서가 증언하고 있고, 성령 강림과 제자들의 복음전파는 사도행전과 사도들의 서신서에 나타나고 있다.

교회는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여 침례를 받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의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 (행 2:42-47) 함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오래지 않아 종교적, 정치적 박해 아래 놓이게 되었다. 유대주의자들은 교회를 ‘이단’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박해를 가했으며 교회가 황제 숭배를 거절한다고 로마 정부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유대 전통과 로마 법에 의해 불법적 종교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리스도 인들은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며 세계 곳곳에 교회를 세워 나갔다. 기독교 박해의 긴 역사가 끝난것은 로마의 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us) 대제에 의해서였다 A.D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의 종교중 하나로 공인했다. 그후 A.D 392년에 데오도시우스 (Theodosius)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포했다. 이때로부터 로마 제국 안에서는 니케아신조에 입각한 기독교만이 국교가 되고 다른 모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극형에 쳐해졌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황제도는 A.D 594년 로마 교회의 감독인 그레고리 1세 (Gregory I)때 시작되었는데 이때부터 정치와 종교가 밀착되었다. 로마 교회 감독이 교황이 되어 세속 권력까지 지배한 것은 A.D 800년경 찰스대제 (Charlemagne) 때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개인의 신앙고백과는 상관없이 유아세레를 주고 유아세레를 받은 어린아이에게 종교세를 받아 그돈으로 교회를 유지했다. 결국 로마 카톨릭교회는 권력을 등에 업고 교회를 발전 시키고 유지하다가 성경적 원리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부와 명예와 권력을 한몸에 지닌채 감독, 대감독, 주교, 대주교등의 성직 계급을 구체화 하면서 교권 투쟁에 몰입했다. 그리고 각 지방의 문화와 풍속을 받아들여 신앙의 미신화를 가져오고 마리아 숭배와 성자숭배, 천사와 화상 숭배등을 합법화 함으로써 교회는 세속화 되었고 로마 교구의 대감독과 콘스탄티노플 교구의 대감독간의 교권 싸움으로 1054년에 이르러 동서교회로 분열하고 말았다. 로마교회는 분열후에도 회개하거나 바른 신앙을 회복하려는 노력은 조금도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고 황제의 권력과 우위다툼을 벌렸다. 이때의 기독교는 복음으로 백성을 구하는 것보다 종교의 이름으로 백성을 억압하는 집단으로 보였다.

로마 교황은 하나님의 지상 대리자가 되어 사람의 죄를 사하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생사 여탈권을 행사했고 주교들은 성도들의 재산을 감언이설로 갈취해 갔다. 심지어 비 협조자에게는 ‘이단’ 이라는 누명을 씌어 그 재산을 통째로 빼앗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뇌물을 주고 성직자도 되고, 주교도 되고, 대주교도 되고, 교황이 되어 교회를 통치했다.

1517년 루터가 교회 개혁의 횃불을 들자 독일과 스위스와 프랑스에서 수많은 성직자와 지성인들이 개혁파에 합류했다. 그들은 역사속의 교회가 갖고 있던 잘못된 유산들을 버리고 성경속의 교회로 돌아가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다. 성경을 연구한 사람들은 성경적 원리에 입각한 믿는 자들에 의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종교개혁 운동에 참여했다. 15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은 성경적 교회를 세우기위한 운동이었다.

종교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 가운데 믿는 자의 침례를 주장하며 유아세례를 거부한 사람들이 재 침례(Anbaptist)들이다. 당시만 해도 교회가 믿는 자들에게 침례를 주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 이었다. 유아세례를 주고 그들이 내는 종교세에 의해 교회가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 침례파중에 맨 처음 침례를 준 사람은 콘라드 그레벨 (Conrad Grebel)이다. 콘라드 그레벨은 불안과 압박이 교차하는 가운데 1525년 1월 21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무릅을 꿇고 간절히 기도한 후 그를 따르는 사람중에 한 사람이었던 게오르게 블라우로크 (George Blaurock)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게오르게 블라우로크도 그곳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 침례를 베풀었다. 그러자 침례를 받은 사람들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고, 복음을 가르치며, 믿음을 지키는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임을 몸소 서약하였다. ([재침례 교도의 역사] -요단 출판사 P34-35)

이들은 인간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수 있다고 외쳤다. 성경 외에는 교회의 그 어떤 권위도, 어떤 사람도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될수 없다고 외쳤다. 특별히 재 침례파중 한사람인 빌헬름 로이블린 (Bilhelm Reublin)은 유아세례를 강력히 거부하며 유아세례가 비 성경적임을 맨처음 설교했다. 팰릭스 만츠(Felix Manz)는 유아세례를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해 수장을 당하였다. 만츠는 수장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면 신자의 침례만이 참된 침례”라고 선언했다. ([재침례 교도의 역사]-요단 출판사 P66-67) 그후 그레벨에게 침례를 받은 게오르게 블라우로크는 티롤(Tyrol)에서 화형을 당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교황이 내린 사제직을 버렸고, 유아세례를 거절 하였으며, 사람들에게 새로운 침례를 설교하였기 때문이고 .... 그리스도와 모친 마리아에 대한 경배와 기도를 거부하였기 때문’ 이었다.

유아침례를 반대한 발타자르 휘브마이에르 (Balthasar Hubmaier)도 쯔빙글리에게 혹독한 미움을 받다가 결국 1528년 비엔나에서 화형을 당하였다. 당시 휘브마이에르가 주장한 것은 ‘침례는 반드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그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 선행되어야 하며, 회심자는 자신의 믿음과 뜻을 공적으로 고백하는 수단으로 물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후 한스 후트 (Hans Hut), 셀베투스 (Servetus) 같은 사람들도 화형을 당했다. ([침례교의 유래] -생명의 말씀사 P14)

정치와 결탁하여 세속화 된 교회를 거부하며 성경적 교회를 세우기 위해 믿는 자의 침례를 주장하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나그네처럼 살다가 결국 순교를 당했다. 이들이 침례교회의 이상을 주장한 믿음의 선배들이 되었고 신앙의 뿌리가 되었다.

 

  영국과 미국의 침례 교회

 

성경을 최초로 영어로 번역한 위클리프와 문예부흥의 발흥과 인쇄술의 발전이 영국에서는 영국 국교회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영국왕 헨리 8세 (Henry VIII)와 로마 교황 클레멘트 7세 (Clement VII)간의 정치적 갈등이 영국에서 로마 카톨릭 교회를 몰아내고 영국 국교회 (Episcopal)가 세워지게 된 배경이 되었다. 하지만 영국 국교회는 로마 카톨릭 교회를 그대로 답습했다. 이에 영국 국교회의 권위에 대항하는 비 국교도인이 생기게 되었다. 이때 영국 국교회에 남아 정화작업을 해야 한다는 청교도 (Puritans)와 이러한 보수적인 태도를 못 마땅하게 여기고 독립적인 조직을 만든 분리주의자 (Separatist)들이 있었다. 이 분리주의자들 중에 죤 스미스 (John Smith)가 있었는데 그는 성경의 권위에 심취해 있었기에 영국 국교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영국으로부터 추방당해 1609년 37명의 회중을 이끌고 화란으로 건너갔는데 이들은 암스테르담에서 모두 침례를 받았다. 침례 의식을 통해 화란에서 영국 침례교회가 탄생했는데 이것을 최초의 침례교회로 보고있다 ([침례교의 유래] -생명의 말씀사 P21) 그후 죤 스미스와 함께 사역했던 토마스 휄위스 (Thomas Helwys)가 1612년 다시 영국 스피탈필드로 돌아와 최초의 영국 침례교회를 세웠다. 그는 [불법의 비밀에 관한 소론] 이라는 책을 발행하여 군주에게 도전했다. 이로 말미암아 훼위스는 투옥되고 죽을것을 알았지만 마음속에 타오르는 진리를 제임스 왕앞에 나가 외치지 않을수 없었다. 결국 휄위스는 죽음을 맞았고 그의 죽음은 영국 베드포드 침례교회 목사였으며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John Bunyan)을 탄생케 했다.

1620년경 청교도들이 미국으로 건너올때 개인의 신앙과 예배의 자유를 찾는 분리주의자들도 신대륙에 도착했다. 그들중에 로저 윌리암(Roger Willam)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1636년 12명의 남자와 가족들을 이끌고 로드 아일랜드주에 정착하여 침례를 행하므로 최초의 미국 침례교회인 프로비던스 침례교회를 세웠다. 그후 신앙의 자유 때문에 영국에서 추방당한 존 클락(John Clark)에의해 로드 아일랜드 뉴포트에 두 번째 미국 침례교회가 세워졌다. 이러므로 침례교회는 뉴 잉글랜드에서 급속히 성장하였는데 유아세례를 거부함으로 말미암아 주위 사람들로부터 ‘재침례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재침례파들은 ‘오류 투성이의 사람들’ 혹은 ‘이단의 범죄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 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그러나 이런 경멸과 박해 속에서도 침례교회는 꾸준히 성장하여 1684년 사우스 캘롤라이나주에 찰스톤 침례교회가 세워졌다. 기록에 의하면 미국 대각성 운동과 개인 구원의 체험을 주장하는 복음주의 사람들의 영향으로 침례교회는 1733년 500명, 1774년에 35,000명, 1800년에 100,000명, 그리고 1990년에는 미국 남침례 교인만 16,000,000명 (미국 전체의 침례교인은 약 35,000,000명)에 이르게 되었다.

미국의 침례교회는 선교의 아버지 윌리암 케리 (1761-1834), 설교의 왕 찰스 스펄전(1834-1932), 오늘날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빌리 그레엄목사, 릭 워렌목사와 같은 훌륭한 침례교인들을 배출하게 되었다.

 

  한국의 침례교회

 

한국의 침례교회는 1889년 12월 8일 캐나다에서 온 독립 선교사 맬콤 팬윅(Malcom C. Fenwick)의 선교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침례교 목사도 아니고 침례교인도 아니었다. 신학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강력한 영적 경험을 토대로 원산등지에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그는 1893년 본국으로 귀국하여 신학 교욱을 받았다. 보스톤의 고든 (A.J Gordon)목사가 운영하던 보스톤 선교사 훈련학교에서 선교 훈련을 받으며 친분을 쌓는 가운데 침례교인이 되어 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 순회 선교회’를 조직하여 1896년 4월 원산으로 돌아왔다. 펜윅은 고든 목사밑에서 선교사 훈련을 받았던 선교사들의 제안으로 1901년 보스톤 크라렌돈가 침례교회에 소속되어 있던 ‘엘라씽 선교회’를 ‘한국 순회 선교회’와 병합했다. 그후 폴링(E.C. Pouling) 선교사 부부등의 선교 사역으로 공주와 칠산, 강경에 최초의 침례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1901년 원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펜윅선교사가 엘라씽 선교회의 선교지역인 충청도와 전라북도를 인수받아 역동적인 순회 전도 북음활동을 펼쳐 충청도와 전라도 북부, 경상도 북부지역에 31개의 침례교회를 설립했다. 한국을 위시하여 동북아의 선교에 뜻을 둔 펜윅선교사는 보다 효과적인 선교사업을 위하여 1906년 10월 6일 강경에 전 사역자를 소집하여 대회를 열고 46개조로 된 교구를 만들어 ‘대한 기독교회’를 조직하였다. 매년 소집되는 대회를 ‘대화회’라 하고 첫 대화회에서 (1906년) 국내의 효과적인 전도활동을 위해 교단 산하에 원산 강경 공주 영동등 구역을 설정하고 지도자를 새워 교세를 확장해 나갔다.

아울러 한 태영외 4인을 함경도와 간도로 파송, 전도하게 함으로써 선교 지향적 교단의 출발을 보였다. 1921년에는 일제가 ‘대한’이라는 국호를 사용치 못하게 함에 따라, 그리고 국경을 넘어 동북 아시아 선교의 비젼을 담기위해 ‘동아 기독교회’로 교단 명칭을 바꾸어 만주, 시베리아, 간도등에 많은 선교사와 순회 전도사를 파송하여 교회를 세웠다.

이시기에 침례교단은 이미 많은 순교자를 배출했는데 특기 할 만한 것은 모두 복음 전도에 힘쓰다 해난사고로, 공산당에 의해, 또는 일제 밀정으로 오인되거나 만주 토족의 습격으로, 또는 일제 박해에 의해 순교 당했다. 특히 1925년에는 총회가 일제치하의 학교 교육을 금지하는 훈령을 내리고, 일제의 황궁 요배와 신사참배에 불응하여 갖은 박해와 고난을 받았다. 1941년 원산 32인 사건은 교단에서 발행한 성경을 불온문서로 취급한 일제에 의해 당시 총회장 이 종근감독을 위시해 32명의 교역자가 모든 재산을 압류당하고 옥고를 치르게 된 사건이다. 결국 1944년 5월 10일 일제는 교단 해체령을 내렸다. 당시 통계로 한반도와 만주, 간도지역에 26개 구역 (현 지방회)과 400여개의 침례교회가 있었다.

해방과 더블어 교단 재건에 나섰는데 (남한 6개 구역 42개 교회), 마침 미국 남침례교회 해외 선교부와 선교 협정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대한 기독교 침례회’로 교단 명칭을 변경하고 1951년 침례병원을 설립했는가 하면 1953년 침례회 출판사를 설립해 오늘의 진흥원으로 발전 시켰고 1954년 대전에 ‘침례 신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2006년 6월 현재 교단 명칭으로 ‘기독교 한국 침례회 (The Korean Baptist Convention)'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고, 전국 111개 지방회, 2500여개의 교회와 11개 기관 (침례 신학 대학교, 교회 진흥원, 침례병원, 침례 신문사, 국내 선교회, 해외 선교회. 군경 특수 선교회, 교역자 복지회, 전국 남전도 연합회, 전국 여선교 연합회, 뱁티스트사)이 있다. 2004년부터 범 교단적으로 ’3000교회 100만 성도‘를 위해 매진하고 있다

 

445-390 TEL : 031-213-3581 지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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